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역대 독일 연방의회 선거 (문단 편집) === 제9대 총선 (1980) === ||<-3> 1980년 10월 5일[br]{{{-2 총원: 497석, 과반의석: 249석}}} || ||<-2><#e20019> [[빌리 브란트|{{{#fff '''슈미트'''}}}]] {{{#fff '''3기 내각'''}}}[br]{{{-2 {{{#fff '''271석'''}}}}}} || 야당[br]{{{-2 226석}}} || ||<#e20019>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 ||<#ffed00> [[자유민주당(독일)|{{{#000 자유민주당}}}]] ||<#000000> [[CDU/CSU|{{{#fff CDU/CSU}}}]] || || 218석 || 53석 || 226석[br]{{{-2 174석+52석}}} || 사민당의 현직 총리 [[헬무트 슈미트]]는 3선에 도전했고, CDU/CSU 측에서는 [[바이에른]]의 주지사로 재직 중이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총리 후보로 등장했다. 이 선거에서 CDU/CSU는 4년전에 비해 17석이 줄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민당을 누르고 원내 제1당을 차지했다. 그러나 사민당과 자민당의 연정이 이어지면서 슈미트는 총리에 연임되었다. 슈트라우스는 '''기사련(CSU)''' 출신이었는데, 기민련이 아니라 기사련 출신이 총리 후보로 나선 것은 이 때가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슈트라우스는 1962년 슈피겔 지가 국방부의 비리에 대해 폭로하자, 슈피겔 편집인들을 반역 혐의로 기소하였던 전례에서 보이듯이 정치적으로 강경 우파적인 인물이었고, 이는 그의 열렬한 표밭이던 바이에른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마이너스로 작용했다.[* 슈미트도 야당 여당을 안가리고 자기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냉소와 조롱을 뱉어내는 독설가로 유명했는데(해당 선거가 있기 직전, 운동권 출신 당내좌파들이 경제 및 복지정책을 더 좌클릭할 것을 요구하자, 전국에 생중계되는 전당대회에서 행한 "댁들은 지금의 [[오일쇼크|경제상황]]을 이해할 뇌도 없소?"라는 내용의 발언은 지금도 자주 회자된다.), 슈트라우스는 이 슈미트보다도 두 수 더 뜨는 거친 막말로 악명이 자자했다.][* 결국 1980년의 총선 이후 슈트라우스는 중앙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며 CDU/CSU의 헤게모니는 [[헬무트 콜]]에 의해 확실히 장악된다.] 하지만 슈미트 정권은 내우외환의 위기를 겪게 되는데, 우선 경기가 심각하게 침체되면서 지지율이 떨어지게 되었다. 지지율이 떨어지자 이전부터 슈미트와 대립해 오던 사민당 내부 강성 좌파들의 불만이 폭발하게 되었다. 슈미트는 사민당에서 매우 자유주의적이고 우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경제 정책에서 슈미트의 이러한 점은 두드러졌다. 슈미트의 정책 방향에 대해 사민당 내 상당수 인사들은 기민당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런 측면이 있었다. 점점 세력을 불려가던 당내 강성 좌파들은 슈미트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대놓고 반대와 비난을 퍼부었다. 슈미트는 어쩔 수 없이 강성 좌파의 요구를 일부 수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슈미트의 당내 입지는 더욱 약해졌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사례와 비슷하게, 슈미트가 총리에 오른 뒤에도 사민당의 당수는 오랜 기간 (슈미트보다 훨씬 좌파 색채가 강한) 빌리 브란트였고, 빌리 브란트는 1980년대 초반 독일 전역에서 일어나던 슈미트 내각에 대항하는 반핵운동에 참가해서 연설을 하는 등, 슈미트에게 내부총질도 서슴지 않았다. 결국 1982년 부자 증세 및 독일 내 핵무기 배치를 놓고 사민당 내에서 대분열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렇게 사민당 내에서 강경 좌파 기류가 강해지자 이로 인해 연정 파트너였던 자민당에서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이 틈을 놓치지 않은 CDU/CSU는 자민당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여 1982년 내각불신임안을 통과시켰고, 슈미트 내각은 붕괴하고 만다. ||<-2><#000000> [[헬무트 콜|{{{#fff '''콜'''}}}]] {{{#fff '''1기 내각'''}}}[br]{{{-2 {{{#fff '''279석'''}}}}}} || 야당[br]{{{-2 218석}}} || ||<#000000> [[CDU/CSU|{{{#fff CDU/CSU}}}]] ||<#ffed00> [[자유민주당(독일)|{{{#000 자유민주당}}}]] ||<#e20019> [[독일 사회민주당|{{{#fff 사회민주당}}}]] || || 226석[br]{{{-2 174석+52석}}} || 53석 || 218석 || 슈미트 내각의 후임으로 의회에서 선출된 사람은 바로 기민련의 당수 [[헬무트 콜]]. 그렇게 CDU/CSU는 1969년 이후 13년만에 집권 여당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의회 해산이 없이 여당과 야당이 뒤바뀐 것은 이번이 유일하다. 1979년 창당한 [[동맹 90/녹색당|녹색당]]이 처음으로 선거에 참여해서 1.5%를 득표했다.[* 당시 기타 정당의 합계 득표율이 2%를 넘지 않았으니, 기타 정당 득표 대부분이 녹색당에게 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